'답답한 기운이 가시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했던 유자는 원래 중국 양쯔강 상류가 원산지인 아시아의 특산물인데,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 일본, 인도의 아셈지방에서 재배하며 한국의 것이 가장 껍질이 두껍고 향이 진하다.
한반도에서는 신라 문성왕 2년 (840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중국으로부터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선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했던 완도에는 예부터 유자나무가 많다.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폭력임금으로 손꼽히는 연산군(재위 1494-1506)의 남다른 유자사랑 이야기다.
연산군은 대체로 즉위 3년까지는 큰 탈 없이 임금의 자리를 보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폭정이 시작된 것은
즉위 3년부터인데, 그 즈음에 유자에 관한 이상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즉 연산군 3년 10월 14일에 경상도와 전라도 감사에게 어서을 내려 '유자는 가지를 붙여 진상하라'고 한것이다.
왜 가지를 붙여 진상하라고 했을까? 단지 먹기 위한 것이라면 열매로도 충분하다.
혹시 왕의 침실에 걸어놓고 향기를 맞으려고 하다 보니 가지가 없어서 불편했던 것일까?
연산군 9년 10월 14일에는 '유자를 더 많이 바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듬해에는 절대로 얼리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으며, 또
그 이듬해에는 흙까지 붙여서 바치되 상하지 말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연산군은 다만 유자뿐 아니라 석류, 동백, 장미 등도 모두 흙을 붙여 바치게 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감사들이 연산군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흙까지 붙인 화초들을 연일 나르게 하다 보니 길에서 지쳐 쓰러져 죽는 백성들까지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이쯤되면 연산군이 유자를 꽤나 아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연산군은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린 이듬해에 쫓겨나고야 만다.
유자가 귀하긴 귀했던 것이 연산군보다 3백년이나 뒤의 임금인 순조 때의 진상물품에 든 유자가 전라, 경상 각도마다 일년에
한 차례씩 300개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면 알 수있다.
이것은 유명한 '조흥시가'로 박인로가 친구 이덕형( 유명한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음이 이 사람이다) 의 집에 갔는데
마침 홍시 대접을 받고는 주인 몰래 품어다가 돌아가신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만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서럽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박인로는 '비록 유자는 아니지만' 이라고 했다.
이 표현을 통해 당시 양반 가문에서조차 유자는 극히 보기 드문 귀한 과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